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J. R. R. 톨킨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톨킨의 조상은 대부분 기능공이었다. 가족의 기원은 나폴레옹 시대 독일 [[작센 왕국]]으로, 작센 지방 [[독일어]] 방언을 사용했다. 18세기 경부터 영국에 거주하였다고 하며 이주 후 바로 정통 영어를 쓰는 영국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톨킨은 Tollkiehn의 영국식 이름으로 영어로는 덜 킨(Dull Keen), 즉 모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톨킨의 할아버지 존과 할머니 서필드는 [[침례회|침례교]]인으로 [[버밍엄]]시 중앙에 가게를 소유하였다고 한다. 서필드 가족은 한 빌딩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하였다고 한다. 톨킨의 고조부인 윌리엄 서필드는 [[1810년]]부터 서점과 문방구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톨킨의 증조부인 존 서필드는 포목업과 메리아스 직조업에 종사하였다. 1892년 톨킨은 현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렌지 프리 주의 주도인 블룸폰테인에서 은행 지점장인 아버지 아서 류엘 톨킨과 어머니 메이블 서필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서는 불룸폰테인 지사에 승진 발령나면서 영국을 떠났다. 톨킨 외에도 1894년에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 톨킨은 정원에서 바붐 거미에게 물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톨킨의 집에서 일하던 사환이 톨킨을 자기 고향에 데려갔다가 다음날 집으로 보내준 적도 있었다. 톨킨이 예쁜 아이라 생각해 자랑하려 했다고 한다. 한편 톨킨의 부친은 톨킨이 3살 되던 해에 류머티즘 열로 사망했는데, 당시 모친은 동생과 함께 영국에 장기방문 중이었다. 가장을 잃은 톨킨 가족의 당장 생활을 걱정하게 된 모친은 어린 톨킨을 외할아버지에게 보냈다. 그 후에는 우스터셔로 이주했고 이 시골 마을은 후에 톨킨의 작품에 큰 영감을 주었다. 어머니 메이블은 직접 두 아들을 직접 가르쳤는데 톨킨은 가족들에게 섬세한 학생이었다. 톨킨이 식물을 좋아한다고 판단한 모친은 그에게 식물학을 가르쳤다. 어린 톨킨은 풍경과 나무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사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언어였다. 그의 모친은 톨킨이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라틴어의 기본을 가르쳐 주었는데 4살이 되던 해에 글을 읽기 시작했고 곧 자연스럽게 글을 썼다고 한다. 모친은 그에게 많은 책을 접할 기회를 주었고, 어린 톨킨은 "보물섬"이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싫어했으나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심란해 하면서도 즐겼다고 한다. 그는 조지 맥도널의 판타지 "레드 인디언"과 앤드류 랑의 "페어리 북"을 좋아했는데 후에 톨킨의 작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톨킨은 [[버밍엄]]의 킹 에드워드 스쿨에 입학했다. 그는 조지 5세의 대관식 정렬식때 버킹엄 궁전 게이트에 붙일 포스트를 함께 작업했다. 상당히 공부를 잘해 전교에서 인정받았던 학생이었다. 그후 톨킨은 세인트 필립 스쿨에 입학하게 된다. 이 당시 어머니 메이블은 1900년에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에 입교하게 되며 그로 인해 가족들에게서 재정적 지원이 끊어지게 된다. 그로부터 4년 후 메이블은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때에 톨킨의 나이는 12살이었다. 톨킨은 모친의 사망은 믿음 때문에 순교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가톨릭 신앙이 그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메이블이 죽기 전에 두 아들의 후견인으로 버밍엄 오라토리오회[* Birmingham Oratory. 참고로 오라토리오회는 [[필리포 네리]]가 설립한 재속 사제 공동체이다.]의 프랜시스 자비어 모간 신부를 지목했고, 톨킨은 버밍엄 에지바스턴 지역에서 페로트 폴리와 빅토리아 풍 건물인 지역 급수소 근처에 살았다. 이들은 톨킨이 반지의 제왕에서 다크 타워를 상상 해내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에 영향을 준 다른 요소로는 버밍엄 박물관에 무료로 전시하였던 프리-라파엘리티 브라더후드와 에드워드 번-존스의 로마풍의 중세 그림들이었다고 한다. 1911년 톨킨은 킹 에드우드 스쿨에서 롭 길슨, 제프리 스미스, 크리스토퍼 와이즈맨 3명의 친구를 만나 자신들만의 비밀 조직 the T.C.B.S.를 결성하게 된다. 그리 거창한 조직보다는 친분을 다지는 모임으로, 이 조직의 이름은 Tea Club, Barrovian Society에서 따온 것으로, 학교 근처의 바로우 스토어에서 차를 마시는 것을 즐겼던 그들이 생각해낸 이름이다. 이들은 졸업 후에도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1914년 런던의 와이즈맨 집에서 다시 뭉쳤고 톨킨에게 이 모임은 그가 시를 쓰는데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1911년 톨킨은 스위스로 휴가를 가게 되는데 이 여행은 빌보가 미스티 마운틴으로 여정에 직접적인 영향이 되었다. 그해 10월 톨킨은 [[옥스퍼드 대학교]] 엑스터 칼리지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인문학을 공부했지만 전공을 바꾸어 영어언어학을 공부하고 1915년 졸업했다. 톨킨과 동생 힐러리가 같은 기숙사에 입숙했던 해, 톨킨은 16세가 되던해에 자신보다 3살 연상의 [[이디스 톨킨|이디스 메리 브렛]]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후견인이었던 모건 신부는 톨킨이 개신교(성공회) 여인과 사귀는 것에 놀랐고 또 이디스를 톨킨의 학업을 방해하는 문제거리로 보고 21살이 되기전까지 그들의 만남을 금지한다. 톨킨은 결국 이 조건에 따르게 되며 21세가 되던 생일 아침에 톨킨은 이디스에게 자신의 사랑을 다시 받아주고 결혼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톨킨이 자신을 잊은 줄만 알았던 이디스는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하지만 결국 톨킨을 선택하고 결혼을 하고 톨킨의 설득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16년 3월 22일 둘은 워릭에 소재한 세인트 마리 이마큘레이트 성당에서 결혼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